화가가 건져 올린 ‘호수 속의 달’
다양한 이미지를 묘사한 신영성의 작품에서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은 어둠과 함께 떠오르는 둥근 형태들이다. 얼굴, 달, 풍선, 과일, 징, 밥그릇… 원에 가까운 둥근 형태들이 여러 가지 사물로 변화하며 단순하고 부드러운 윤곽 안에 세상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신영성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인간이 건지려 하는 ‘호수 속의 달’을 그린 것이고 말한다. 그것은 희망이자 환상이며 그리움이고 초혼의 울림이다. 또 그것은 생명의 양식이고 일종의 우주이며 무엇보다 ‘사람’ 그 자체다.
이번 전시회의 대표작인 <만인사유상>은 수많은 얼굴들로 가득 찬 대작이다. 그 얼굴 하나하나는 독립된 개인이지만 한꺼번에 모여 있으니 개성이 사라지고 단순히 반복되는 원들로 여겨진다. 그곳에서 주체는 수많은 타자들 속에 섞여, 다른 주체의 타자로서 존재 한다. 군집을 이룬 유사한 형태의 반복으로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신영성은 ‘나’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해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의미, 생명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처음에는 자화상이 나 주변 사람의 초상과 같은 단독자로서의 인물의 얼굴을 탐색하다가 점차 서로 긴밀히 얽혀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로 관심을 돌린다. 그림의 대상이 가까운 공동체에 이어 우리 사회와 국가, 전 세계로 확산된다. 그림 속에는 유명 정치인이나 대중 스타처럼 잘 알려진 인물도 보이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인물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저마다 사연을 지녔을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얼굴을 맞대고 이웃으로, 또 다른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IBM, 코카콜라 같은 다국적 기업들의 익숙한 로고가 섞여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우리는 이들 거대 기업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제품들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공통된 욕망으로 몰아간다.
그림에서 둥근 모양으로 단순해진 얼굴들은 모두 욕망을 지닌 덩어리들이다. 사람들 사이에 여기저기 놓인 사다리가 상승의 욕망을 대변한다. 거기에는 <이브>로 표상되는 하나의 근원이 있다. 이브는 최초의 여자, 최초의 어머니로서 인간에게 욕망과 상실을 야기한 원초적 근원이다. 그녀를 통해 개인의 욕망은 보편적인 욕망이라는 근거를 찾게 된다. 이브는 좋든 싫든 공존해야 하는 관계 속에 자리한 끊을 수 없는 유대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집적된 형태들은 빨간 열매가 화면을 가득 채운 <체리> 연작에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끝없이 나열된 동글동글한 열매들이 사 람들의 둥근 얼굴과 오버랩된다. 체리 또한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욕망의 열매다. 강렬한 빨간색, 반들반들한 광택, 달콤한 맛과 향기…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과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메타포이다. 나무에서 분리된 열매는 더 이상 살아있지 않으며, 잠시 향미를 유지하다가 곧 썩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과일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삶에 대한 확고한 상징으로 통용된다. <체리>에 나오는 열매들은 거의 균일하지만 크기와 모양이 조금씩 달라서 서로 구별된다. 그림 오른쪽 맨 밑에는 붉은색이 벗겨진 듯한 열매 하나가 섞여 있다. 완벽하게 빨간 열매들과 달리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눈에 잘 띄는 그곳에 화가는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불완전한 열매는 결국 무 수한 반복 속에 작은 차이로 존재하는 화가의 개성이자 우리 ‘자아’의 모습이다.

신영성의 그림에 동그란 유형으로 되풀이 등장하는 얼굴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존재하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 가운데는 좀 더 유명한 사람도 있지만 작품이 커질수록 그들은 상대적으로 작아져 큰 세계 속에 작은 원으로 묻혀간다. 현대인들은 인간 영웅보다는 인 간이 개발한 기술의 힘이 가져다줄 초인적 존재에 대한 환상을 키운다. 그러한 현실을 비유한 작품이 <슈퍼 히어로> 연작이다. 배트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들이 자본의 힘으로 대중문화 속의 영웅으로 부상한다. 이들은 신영성의 작품에서 화면 전체를 점유하며 막강한 힘을 과시하듯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결같은 짙은 어둠에 싸여 단독으로 서있는 그 우상 들은 고립된 것처럼 보이며, 친근하기보다는 왠지 공허하고 막연한 두려움마저 불러일으킨다. 인공지능 로봇이 발달하면 우리는 ‘슈퍼 히어로’들을 영화 속이 아닌 현실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면 그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이로운 존재가 아니라 끔찍한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둥근달처럼 비슷비슷한 얼굴들은 우리가 흔히 잊고 지내는 본연의 순박함을 드러내며 인간이란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얼굴로 표현된 수많은 사람들이 화면에 한데 모여 단독으로는 이룰 수 없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집단은 변화하고 증식하는 잠 재력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삶과 사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힘이기도 하지만, 유한한 존재가 감당해야 할 고통과 죽음에 대해 당면한 절박함을 표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의 우울한 단편들을 그리는 것은 그 소멸을 받아들임으로써 끝없이 다시 생산하고 번성하여 무한한 세계로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작가가 소망하는 세계에 대한 꿈, 생명에 대한 의지란 그처럼 소멸과 생성의 반복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얼굴이 담긴 여러 개의 캔버스가 잇대어지면서 작품은 한계를 넘어 계속해서 확장된다. 신영성의 작품은 끊임없는 생성의 염원이 녹아든 거대한 세계의 작은 단편이다. 그리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둥근 형태들은 ‘만인’의 욕망, 즉 화가가 수없이 건져 올린 ‘호수 속의 달’이다.

박은영(미술사가)


예술, 삶과 소외된 인간의 회복
신영성의 그림에는 숱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희로애락을 드러낸 다양한 표정의 인물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면은 서로 다른 성별과 연령, 계층과 종족들이 한데 어울리도록 배치되어 있다. 그들의 표정은 일상 속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다소간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들이나 정형화된 인물들이라기보다는 무대 뒤편 또는 구석이나 주변부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내는 인물들이다. 인물들은 펜으로 정교하게 그려져 있고, 대체로 검은 색조를 띄고 있는 화면으로 인해 기쁜 표정의 인물마저도 형언할 수 없는 깊은 회한과 우울을 드러내고 있다.

기실 그는 80년대 중반 한국 현대미술의 물고를 돌려놓았던 실험적 미술동인인 <난지도>의 핵심 멤버로 장르를 넘나드는 전위적 작가였다. 당시는 오랫동안 기득권을 구가해오던 모더니즘 세력을 극복하기 위한 젊은 세대들의 움직임으로 화단의 지형도가 급변하던 시기로써, 그는 설치미술과 행위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그의 작업은 시계나 선풍기와 같은 오브제들을 전기톱으로 갈아내거나 전기인두로 지짐으로 그 기능을 해체시켜 새로운 사물로 제시하는 작업이 주종을 이루었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을 다양한 행위예술로 보여주었다. 이는 제도와 권위의 언어 속에서 예술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획득하기 위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상실한 인간성의 단면을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그룹 <난지도>와 <Meta-Vox>를 중심으로 펼쳐진 80년대 탈(脫) 모던 운동은 당시의 만연해 있던 모더니즘의 권위에 강한 도전을 제시하며, 한국적 어법을 통해 서구 모더니즘을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미술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화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근작은 양태는 다르지만 80년대 작업과 접맥 되어 있다. 80년대 오브제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사물의 언어를 회복시키고자 했던 노력은 근작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회복을 꿈꾸는 시도와 동일한 문맥인 것이다.
인두로 지져 형태를 알아볼 수없이 일그러져버린 선풍기는 물질문명에 희생되고 말살된 인간과 자아의 모습이며, 근작에서 보여주고 있는 일그러진 군상들 역시 산업화와 경제적 풍요 속에 소외된 인간성과 자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의 작업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에너지가 좀 더 강하게 드러났다고 한다면, 근작에서는 비판적 에너지가 절제, 승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인물들은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 합리성을 명분으로 한 제도와 권력이 순수한 인간을 억압하고, 물질적 풍요가 인간성을 소외시키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이지만 이를 웃음으로 인내하며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미술관이나 캔버스라는 미술 내적 공간에서 펼쳐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일들과 예술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의 언급처럼 함께 사는 세상이란 예술과 삶의 가치를 양자의 영역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결핍된 부분들을 찾아내는 작업에 관심을 가진다. <난지도> 시절 과도한 물질의 범람과 본능에 빠져 하락된 가치를 보았다면 지금은 그리움이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찾고 있는 듯하다. 모든 인간은 디아스포라이다_‘만인사유상’ 연작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김찬동(미술평론가)


사물과의 交感과 力動的 生命力 - 제1회 申永成 個人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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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2년여 동안, 신예 申永成의 작품이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겻은 아마 저 처참하리만큼 할퀴어져 덩그러미 놓여진 폐품들의 容態가 보여주는 어떤 潛在的 事物로서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최근 젊은 작가들일수록 오브제의 物性에 집중하는 주된 경향 가운데에 申永成은 분명한 방법 하나를 진솔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탐색은 사실 대학을 졸업하던 81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84년까지는 探索期의 면모를 여실하게 보여주었는데 최초의 그이 생각의 실마리는 기둥에 돌을 삽입한다든지 문짝, 한지, 돌, 베 따위의 폐품들과 여타의 물질들을 한데 얽여놓는 組立品으로부터 착상을 일구어 나갔다. 84년과 85년 초애 의자, 탁자, 경대와 같은 일상적 폐품들이 비로서 등장하였다. 그리고 85년 중후반부에 특히 범람하기 시작한 교탁, 진열장, 전축, 책상, 괘종시계, 찬장, 전기밥솥, TV, 전화기, 선풍기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야를 집중적으로 자극하는 물체들의 대종을 이룬다. 申永成의 <方法>은 너무나 간단하다는 점에서 매력을 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는 이러한 품목들을 망치로 두드리거나 전기톱이나 전기인두로 거침없이 썰고 지져서 처음의 폐품의 모습을 처절하리만큼 망가뜨려진 아주 기이하고 새로운 모습의 폐품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旣存의 형상과 개념을 그것이 아닌 다른 형상과 개념으로 바꾸어놓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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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돌아가 다시 언급한다면 그의 方法은 하나의 潛在的 事物로서 <物體>의 해석에 집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폐품작품들은 인간이 모조리 사용한 나머지 그 용도가 생명을 다한 끝에 쓸모없게 되어버린 하나의 물체에 덧붙이는 철저한 <批判>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物體를 批判한다’고 요약될 수 있는 申永成의 경우는 아주 독특한 물체해석의 방법을 보여준다. 그 해석이란 어떤 人間的 狀況에 가하는 신랄한 비판을 우회적으로 사용해서 폐품이라고 하는 ‘쓰레기’에 불과한 물체에다 포문을 여는 것이다. 직접적인 것을 간접적인 例의 動態를 통해서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러한 경우 작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파괴되고 일그러진 폐품의 모습은 어떠한 인간적 狀態를 간접적으로 은유해 보이게 된다.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이는 한계적 상황에 주어진 삶의 구조를 확인하는 한 方法이며 삶의 존재와 의미를 찾고자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처음의 있는 그대로의 폐품은 인간의 ‘한계적 狀況’의 직접적인 告知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발전해서 처음의 폐품을 직접, 보다 적극적이고, 가장 신랄하게 난자해 놓은 잔해로서의 폐품은 한계적 상황 속에 구조를 두는 인간의 존재와 의미를 몸부림하듯 느끼고 확인하려는 投企이며 이러한 뜻에서 그의 손길이 부가된 물체는 인간적 의의를 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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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記述에다 결론을 붙인다면 申永成의 方法은 인간과 사물의 <交感>을 통해 삶의 <力動的> 生命을 회복하려는 수단이다. 그가 망치로 두드려 멀쩡한 물체를 으스러뜨려 폐물화시키는 경우, 이러한 <行爲>는 하나의 ‘퍼포먼스’의 전형적인 예를 미술행위의 수단으로 보여주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경우의 행위에 의해 그는 사물과의 交感을 노리는 것이다. 겉으로 보아 파괴하는 몸짓으로 보이긴 하지만... 한편, 교감하는 순간은 곧 인간의 自己確認의 순간이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물을 보자마자 나는 이것을 그대로 보지 않고 무엇과의 만남처럼 생각했다. 물체의 앞 보다 뒷면과 안쪽을 끄집어내고 싶어졌다. 끝에 가선 결국 시계를 시계가 아닌 것으로 망가뜨려 놓고야 말았지만 그런데도 시계는 보다 여실하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申永成의 방법이 우리에게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의 물체를 다른 하나의 것으로 轉置시키는 방법에 의해 사물의 잠재적인 모습을 거의 돌발적으로 열어 보인다는 점, 그리고 뒤이어 그 순간 인간의 삶의 정황인 현실의 적라라한 모습들이 퉁기어지듯 비집고 일어섬을 의식케 하는 데에 있다. 사물을 사물을 통해서 批判하는 이 야릇한 방법은 그로해서 우리의 삶의 한계가 폭로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적 의지의 간접적 表象을 보게 된다. 궁극적으로 申永成은 이 방법을 자신의 삶의 꿈틀거림, 요컨대 생생한 生命感의 확인을 위해서 사용하는 데에 이른다. 우리는 그의 방법이 가지는 크고 작은 의미들이 가능한 단서를 일찍이 찾아내는 데에 행운을 얻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이다. 그 다음으로 이 행운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생명감을 재생시킬 또 다른 국면을 향해 줄달음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어야 할 것 이다. 그의 첫 관문을 우선 이렇게 새겨 두면서.

김복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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